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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물질의 사랑> 독후감


    7일에 걸쳐서 읽은 책이라 비교적 줄거리가 또렷이 그려지지 않는다. 진득히 읽을 시간이 없어 퇴근길 지하철에서나 잠들기 전 몇십분간 짬내어 읽었다. 그래서인지 이전의 소설들에 비해 몰입을 잘 하지 못했다. 그런 것치고는 눈물이 자주 차오르긴 했다.

    소설집의 제목답게 <어떤 물질의 사랑> 파트가 제일 좋았다. 뭔가 상큼하기도 하고, 짜임새가 가장 훌륭하다고 느껴졌달까? 한 편의 애니메이션 보듯이 재밌게 읽었다. 사랑하는 대상에 따라 성별이 변한다는 설정도 흥미로웠지만, 제일 두근거렸던 것은 라오에게서 비늘조각이 떨어진다는 거였다. 초록빛이 강한 반짝거리는 재질이라고 하니 보석처럼 영롱할 것 같다. 우주에서 온 존재가 라현의 엄마와 어떻게 사랑에 빠졌는가는 조금 의문이 들었지만 어찌됐든 낭만적이게 느껴졌다. 배꼽이 없다는 건 상상이 안 되기도 하고.. 신기했다. 알에서 태어나면 배꼽이 없을 수 있구나. 굉장히 독특한 사연을 가진 사람들치고 비교적 덤덤하게 받아들이며 살고 있어서 나까지 그 사연들을 그러려니하며 수긍하게 되었다. 원래 그런게 어딨냐는 엄마의 말이 참 좋았다. '정상이라고 착각하는 것들에 억지로 하나를 맞췄다가 너를 영영 잃을 것 같았어.' 라는 말도.

    <사막으로>에서 아버지가 묘사했던 별이 가득한 사막의 밤하늘을 덩달아 가슴 설레며 상상했는데, 꾸며낸 거라는 걸 알고 상심했다. 예전에 내가 작업했던, 사막 위에 작은 별과 큼지막한 행성들이 떠있는 밤배경이 떠올라서 즐거웠단 말이다. 그런 것을 볼 기회가 현지인의 윗세대의 윗세대(어쩌면 그보다 더 위)에서 끊겼다니.

    <너를 위해서>는 짧고 굵은 섬뜩함과 통쾌함을 남겼다. 임신한 주체가 남성이라는 점에서 마음에 들었다. 임신을 위해 정신 검사 등 엄격한 심사를 거친다는 것도. 아이를 낳아 기르려면 그 정도는 통과한 사람이어야지. 번식에 책임을 무겁게 지우는 매우 바람직한 사회 같았다. 남성 본인이 본인 몸으로 임신하고, 뱃속에 자리한 것의 안위를 위해서 본인이 희생한다는 경험이라든지 하다못해 두려움이라도 있어야, 지금 여성에게 임신이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 올바르게 이해할 것이다. 그런 의미로, 임신을 한 성별만 한다는 점에서 지금 이 세상은 한결같이 별로다.

    <레시>는 읽으며 가장 눈가가 많이 촉촉해졌던 소설이다. 승혜가 지구 밖에서 만난 생명체와 자신의 딸 기주를 겹쳐 보는데, 바다에 살고 있다는 것과 승혜의 손바닥에 원을 그리는 것 등 둘은 꽤 닮아있었다. 승혜에게 건넨 말까지도. 어쩌면 승혜의 환각이 덮인 묘사일 수도 있고, 다른 동료들은 다르게 알고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싶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읽으면 읽을 수록 착각이면 어떤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애틋하고 서글펐다. 지구에서는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기주가 우주의 다른 행성에서 승혜에게 다가왔다는 이야기는 불가능을 믿고 싶게 만들었다. 이걸 쓰는 지금도 시야가 조금 흐려지는 것 같다.

    서로 시간이 다르게 흐른 뒤에 만난 <그림자 놀이> 이야기는 정말 우울하고 우울했다. '닿을 수 없다'. 이 소설을 읽으며 가장 많이 느낀 감정이다. 초반에 도아의 모습은 떠날 때 그대로인데 이라의 시간은 20년이 지난 후라는 이야기가 마냥 판타지스러워 잘 이해가 안됐었는데, '중력은 시간도 잡고 있다'는 여자친구의 설명을 듣고 그제야 이해가 되었다. 20년의 세월 속에서 이라는 대대적으로 시행된 깨진 거울 수술을 받고 도아가 그토록 돌아가고 싶어하던 이라의 모습을 조금씩 감추게 되었다. 도아가 병실의 침대에서 찢어질 듯이 괴로워한 이유에는 비단 몸의 아픔 뿐만 아니라 변해버린 '너', 이라의 모습도 있을 것이다. 끝내 정의하지 못한 둘의 관계가 나는 못내 맘에 걸린다. 타인의 감정을 끌어오지 않는 수술을 모두가 꼭 필요하다고 여겨, 웃음과 행복, 사랑과 추억 등이 무가치한 것으로 전락하는 세상은 이상적인 세상이 맞을까? 그것 또한 마음에 걸린다.

    <두하나>는 몰입이 잘 안 되긴 했다. 따라가는 게 다소 어려웠다. 그렇지만 동아시아 상공에 등장한 신원미상의 우주 물체에게 오직 남성만 감염되어, 여성들을 무자비하게 죽이며 활개치고 다닌다는 상황은 사실상 지금 세상과 극적으로 다를 것은 없어보였다. 현재 여성들에게 닥친 상황에 판타지요소를 조금 가미한 것 같아 씁쓸한 웃음이 나왔다. 이 작가의 소설에서 드물지 않게 보이는, 묘한 기시감의 미래사회. 어쩌면 이렇게 시간이 흐른 미래에서도 우리는 변함없이 고통받을 것이라는 메시지 같아 무기력해지는 것도 없지 않아 있다. 지구가 한번 폭발했다가 다시 생겨난 듯한 대가리 꽃밭 공상과학 판타지라면 더 거부감 들긴 하겠지만. 솔직히 말하면 <두하나>에서의 세계관이 나에겐 좀 스트레스여서 세계 속에 선뜻 발 들이고 싶지 않았던 것도 있는 것 같다.

    <검은색의 가면을 쓴 새>는 잔잔한 공포영화같다. 근데 이제 현실을 매우 곁들인. 은지가 돈 때문에 1분 1초 전전긍긍하고 밤잠도 빼앗기며 파들파들 살아내는 것이 마치 나같다. 나같아도 그런 기회면 망설임없이 도전했을 것 같다. 최후의 5인에는 못 들어갔겠지만. 이 이야기의 결말에게서 내가 전달받은 메시지는 그거였다. 현실에 목졸린 자에게 먼 이야기는 그저 먼 이야기일 뿐. 먼 이야기가 은지를 구슬리고 구슬려 멀리멀리 돌고 데려온 곳은 결국 은지의 현실 속이었다. 그러한 결말에 나는 좌절하지도 않았다. 나 또한 내 일상을 살며 지겹도록 깨우치고 있는 것이다. 결국 그나마 믿을 것은 아득바득 살아주는 불쌍한 내 몸뚱아리 하나인 것을.

    개인적으로 천선란 작가 소설에는 미래와 우울이 반드시 공존하는 느낌이다. 미래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괴로움, 억울함, 후회, 상실 같은 것들이 적나라해서 어떨 땐 좀 버겁기도 하다. 하지만 그런 적나라한 면 때문에 다가올 근미래를 보다 선명하게 그려볼 수 있어 좋다. 이야기 속 인물들이 가까운 내일에 정말 살아 움직여서, 내 이웃으로 혹은 친구나 동료로 만나볼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대감도 안겨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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